화학물질로 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산업문명 (4) 참사를 제대로 겪은 사회를 향하여 – 2023년부터
- 신범 김
- 4월 26일
- 4분 분량
2025년 4월 25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눠서 올립니다. |
화학안전정책포럼은 2021년에 만들어져서 2025년 현재까지도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2021년부터 의논한 유해성물질지정관리체계 합리화 방안은 3년간의 토론을 거쳐서 2024년 1월 화학물질등록평가법과 화학물질관리법 개정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2023년 겨울에는 ‘전환전략 2033’이라는 전략문건을 합의하여 환경부장관에게 제출하였습니다. 2023년까지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전환과제들을 정리한 것인데, 이것도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 2년간 의논한 결과물입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을 통해 규제가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방식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중장기적 목표를 이해당사자들과 합의하고, 그러한 목표 속에서 규제를 정비하게 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한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가 만났을 때 어떠한 시너지가 발생되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포럼이 만들어진 직후 정권이 교체되었습니다. 윤석열은 화학물질규제를 킬러규제 1호로 놓았습니다. 규제완화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만난 기업들은 신규화학물질에 대해 0.1톤 이상이면 등록하도록 한 것이 부당하다고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부에 규제완화를 요구했습니다. 환경부는 규제완화이건 강화이건 법을 개정하는 것이라면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 다뤄야 한다고 보고 기획위원회에 토론주제로 다룰 것을 제안합니다. 시민사회단체는 훈령의 규정상 다루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보았습니다만, 일방적 규제완화로 접근해서는 안되며 정책문제를 다시 진단하고 대안을 마련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결국 ‘신규화학물질 등록 톤수 완화’라는 산업계 요구는 토론을 거치면서 ‘ 소량 신규화학물질 유해성 정보의 실효성 있는 생산·전달·활용 방안’이라는 주제로 거듭납니다. 토론의 목적은 1톤 미만 신규화학물질을 등록으로 하는 것이 좋으냐 신고로 하는 것이 좋으냐, 신고로 하여도 된다면 정보의 질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 그리고 정보를 정부가 등록과 신고로 수집하는 것은 활용을 위한 것인데 이를 위해 정보 공개가 필요하지 않느냐 등을 검토하여 판단하는 영역까지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토론과정에서 소량 신규화학물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 확인하였는데 반도체 전자산업에서 50% 이상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은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 건강권을 위해 애쓰는 반올림의 상근활동가와 고용노동부 안전보건공단의 전문가를 토론자로 모셔서 노동자 보호 방안을 함께 검토하게 됩니다. 토론은 2023년까지 이어졌고 2023년 말 합의에 도달합니다. 산업계 요구대로 신규화학물질 등록을 1톤으로 완화하되, 1톤 미만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고 정보에 대한 적정성 검토를 정부가 수행하여 불량 신고가 없도록 관리하기로 합니다. 한편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대로 등록 및 신고된 모든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며, 유해성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물질은 안전한 물질이 아니라 ‘유해성 미확인물질’로서 유해한 것으로 간주하고 관리하는 원칙도 합의되었습니다. 산업계와 시민사회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보한 합의였고,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위험하다고 보는 사전주의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명확히 하는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국회에서 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수당인 민주당은 킬러규제로서 규제가 완화되는 프레임에 대해 우려하면서 법률 개정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초기에 강력하게 형성되었지만, 시민사회가 합의된 내용의 의의를 민주당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에게 설명하여 결국 법개정에 성공하게 됩니다.
두 번째 사례는 2023년부터 시작된 ‘화학사고 즉시 신고’ 논쟁입니다. 2012년 휴브글로벌 불산누출사고로 화학물질관리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화학사고가 발생하면 15분 내로 신속한 신고를 하도록 하고 이를 어기면 강력한 처벌을 하도록 했습니다. 사람이나 환경에 피해가 없는 경미한 화학사고라도 위반하면 동일한 처벌을 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문제제기가 계속 있었습니다. 2023년부터 환경부는 이해당사자들과 소통하면서 제도개선 필요성을 검토하였고, 2024년 화학안전정책포럼 공식 주제로 채택하여 제도개선 방안을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2024년 공개 토론과정에서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는데, 50kg 미만 유누출 사고나 사람과 환경에 대한 피해가 경미한 경우는 15분 이내가 아닌 24시간 이내 보고로 대체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토론을 온라인으로 지켜본 정부 담당자와 시민사회 이해당사자들 속에서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제출됩니다. 정부 내 반대의견을 제출한 사람들은 10년간의 노력을 통해 이제야 신고하는 문화가 정착되는데 이를 흔들게 되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습니다. 시민사회 이해당사자들도 같은 맥락에서 모든 화학사고는 경중을 따지지 않고 즉시 신고하되, 처벌만 조정하자는 의견을 제기합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 기획위원회에서는 아직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보고, 찬반 입장을 밝힌 이해당사자들을 모시고 집중 토론을 하는 모임을 운영하기로 합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 운영규정에는 공부나 상호 의견 교류를 위한 소모임을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24년 말부터 2025년 초까지 4회 정도의 소모임이 진행되었고, 이 자리에서 문제진단이 수정됩니다. 화학사고를 기업 스스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응급대응시스템과 공조할 때 위험이 최소화 됩니다. 따라서 기업에서 경미하다고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신고를 천천히 하는 것 보다는 모든 사고를 신속히 신고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대신 신고 이후의 합리적 행정대응과 처벌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한 공감대가 커졌습니다. 이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은 시민사회단체 토론자들이 기업의 어려움에 대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피해가 없는 경미한 화학사고로 인해 영업정지 처분을 받는 것은 실무자들에게 큰 공포일 수 있다는 점을 시민사회단체가 이해하고 이러한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15분 이내 신고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들이 있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중소기업의 경우 안전담당자가 기업 내부 결재 없이 신고하는 경우가 많으나 대기업은 임원 결재까지 받은 후 신고를 하는 것이 절차라고 합니다. 경미한 화학사고에 대해 임원들은 신고를 꼭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갖는 경우가 있고 이에 대해 설득하려면 15분은 너무 짧다는 것입니다. 기업 내 화학사고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화학안전담당자들이 신고를 하고 싶어도, 정책결정 권한은 비전문가인 임원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하는 것입니다. 소모임 과정에 참여한 토론자들은 화학사고와 비사고의 경계선이 모호하며, 화학안전담당자의 감수성과 기업 임원의 감수성이 다르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아직 소모임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으나, 현재까지 토론 결과를 요약하면 경미한 화학사고 개념을 도입하도록 하고 경미한 화학사고에 대해 기업이 불편하지 않게 행정이 대응하는 절차를 마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즉시신고가 필요한 기준’을 마련하려던 초기의 토론은 ‘모두 신고하되 경미한 사고에 대해 처벌 등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토론으로 전환되었고, 이러한 주제로 2025년에 토론이 더 진행될 예정입니다. 2025년에는 제도개선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환경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사를 잘 겪은 사회가 되어 화학안전 정책을 구성하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일가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화학안전정책포럼이라는 특수한 공론장을 통해 참사를 겪은 나라가 되기 위한 노력은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 희망을 느끼는 이유는, 환경부와 이해당사자들이 만든 오늘의 합의가 내일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럼 없이 말하고 있고, 시행착오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자고 격려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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