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로 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산업문명 (3) 공론장 마련 – 2019년부터 2021년까지
- 신범 김
- 4월 26일
- 3분 분량
2025년 4월 25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눠서 올립니다. |
전세계의 화학물질 참사를 살펴보던 나는 미국과 유럽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에 비해 화학물질 참사에 대해 일찍 대응한 미국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비록 기존화학물질과 신규화학물질을 구분하는 선택을 하였지만,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화학물질 관리 조직부터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2025년 오늘까지도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1990년대부터 법개정 운동을 진행했고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법개정을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에 비해 유럽은 화학물질 관리를 늦게 시작하였고 회원국간의 역량과 자원의 차이로 인하여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으로 꽤 답답해 보이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 회원국 환경부장관 회의에서 화학안전 규제 실패를 선언하고 제도개선을 위한 본격적 도전에 나섭니다. 그리고 공론장을 운영하면서 REACH 제정을 사회적 합의 형태로 이뤄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REACH는 기존화학물질까지 기업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나는 미국과 유럽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를 들어 Vogel의 경우 유럽에서 REACH가 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유럽이 규제실패를 겪으면서 과학기술의 한계에 대한 대중적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사전주의원칙을 국가 시스템의 원칙으로 수용하면서 변화 동력을 얻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유럽이 리우선언을 오르후스협약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REACH 도입에 선행하였기 때문에 화학안전 규제 개선이 공론장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은 미국에 비해 화학안전 기술력이나 행정역량 기반이 더 탁월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럽의 탁월함은 민주주의에 기반한 성찰적 태도가 규제에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 나는 좀 더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2019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살생물제의 날(biocide day)’ 행사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유럽화학물질청(ECHA)이 시민사회단체와 산업계를 이해당사자로서 어떻게 대하는지 확인하면서 한국의 정부 위원회와 다른 투명하고 개방된 공론장 필요성을 더욱 크게 느꼈습니다.
2019년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과 함께 ‘시민과 노동자의 화학안전포럼’을 운영했습니다. 산업계와 환경부를 초대하여 한국사회의 화학안전 목표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공유하였습니다. 정부위원회의 들러리를 서지 않기 위해 시민사회단체가 선택한 정부 밖 공론장이었습니다. 2019년은 화학안전과 관련한 사회적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1톤 이상 기존화학물질 모두 등록하도록 화학물질등록평가법 개정을 하면서 산업계의 불만이 고조되는 한편, 시민사회에서는 근원적 안전을 추구하는 제도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분출되고 있었습니다. 경제신문들을 통해 환경부의 화학안전규제가 매일 공격받는 상황에서 시민사회단체가 참사적 성찰을 통해 지향점을 마련하는 토론을 진행한 것은 영향이 있었습니다. 2020년 환경부는 사회적 혼란을 해결할 방안을 시민사회단체와 의논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단체는 환경부에게 투명한 공론장 실험을 제안했습니다. 시민사회단체는 민주주의를 통해 갈등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취지에 대해 환경부가 동의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환경부는 산업계가 제기하는 불만들 중 유해화학물질 지정관리체계의 비합리적인 면들을 시민사회단체와 산업계가 함께 의논해 개선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협력을 원했고, 시민사회단체는 정부의 들러리를 서지 않는 공론장을 원했습니다. 절충을 통해 2021년에 각자의 바람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실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부는 유해화학물질 지정관리체계 합리화 방안을 주제로 의논하게 되었고, 시민사회단체는 투명하고 개방된 공론장 설계 및 운영 방안 마련을 주제로 토론을 이끌 수 있었습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은 홈페이지를 통해 모든 자료를 공개하고 있으며 토론 영상도 공개합니다. 관심있는 연구자 여러분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이라는 공론장은 매우 독특한 몇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해당사자를 정의하였습니다. 화학안전정책에 이해가 있는 자로서 산업계 이해당사자, 시민사회 이해당사자, 기타 이해당사자가 있습니다. 기타 이해당사자는 대학교수 등 전문가나 대학원생 및 대학생 등을 의미합니다.
둘째, 기존 정부 법정위원회를 대체하기 보다는 보완하는 위상을 선택하였습니다. 환경부의 화학안전 관련 법정위원회는 3개가 있습니다. 이 중 어떤 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 위원회에서 정책결정을 하기 전에 투명하게 다수가 참여하여 의논할 수 있는 유연한 공론장으로 작동합니다. 대신 훈령을 통해 임의적 기구가 아닌 공식적 공론장으로서 위상을 확보하였습니다.
셋째, 의제선정과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기획위원회를 두고 있으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고 투명성과 개방성을 강조합니다. 기획위원회는 정부, 산업계, 시민사회단체 각 4인으로 구성하고, 기타 이해당사자는 기획위원이 될 수 없습니다. 정부, 산업계, 시민사회단체 각 1인의 공동위원장을 두고 기획위원회를 번갈아 운영합니다. 산업계와 시민사회단체 기획위원은 각각의 이해당사자들이 선출하고 환경부 장관이 임명합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각 영역의 대표성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신 기획위원회는 투명하게 토론결과를 공개함으로써 결정의 정당성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소수 입장을 가진 이해당사자들의 참여를 보장하고 이들이 토론과정에서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넷째, 기획위원회를 제외한 모든 주제 토론 회의에 개인의 참여를 인정합니다. 한국사회는 산업계 협회나 단체가 모든 기업을 대표하지 못하며, 시민사회단체 역시 다수의 행동하는 개인을 포괄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해당사자는 개인 자격으로 토론에 참여하여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다섯째, 참여를 통해 공동결정해야 할 정책 영역을 정의하였습니다. 법률의 제·개정사항, 화학3법에 따른 법정계획, 화학안전 관련 법률의 이행점검 및 내실화 방안, 이해당사자 소통 및 참여정책은 환경부가 이해당사자와 의논해서 함께 결정하는 정책 영역이라는 점을 훈령을 통해 명시하였습니다.
따라서 화학안전정책포럼의 등장은 직접민주주의 실현, 전문가권력의 배제, 관료의 주도가 아닌 참여와 공동결정을 실험하였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참고문헌
Vogel, D. The Hare and The Tortoise Revisited: The New Politics of Consumer and Environmental Regulation in Europe. British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2003;33(4), pp. 557–580.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 2019 시민노동자가 만드는 화학안전포럼 정책보고서. 2019. https://nocancer.kr/activities/화학물질-안전/화학안전-정책포럼/
환경부훈령 제1574호. 화학안전정책포럼 운영 등에 관한 규정. 202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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