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로 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산업문명(2) 참사에 대한 깨달음 – 2017년부터 2018년까지
- 신범 김
- 4월 26일
- 6분 분량
2025년 4월 25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눠서 올립니다. |
만약 우리나라에서만 화학물질 참사가 발생하였다면 참사 프레임을 고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유사한 사고가 다른 나라에는 없었는지 찾아보기 시작한 나는 전 세계 국가들이 일정 수준의 경제성장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화학물질 참사를 제각각 겪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1958년 탈리도마이드라는 의약품 때문에 유럽에서 팔다리가 없는 기형아가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참사가 있었고, 미국에서는 시빌액션(Civil action)의 배경이 된 매사추세츠주 우번(Woburn)의 소아백혈병이나 러브캐널(Love canal) 사고와 같이 화학물질 공장과 매립지 주변에서 소아암이 곳곳에서 발생되는 암마을(Cancer cluster)을 겪었으며,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을 겪었습니다. 급성적 노출에 의한 참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북유럽의 잘사는 나라들에서 생식기암과 불임의 증가 또한 일종의 만성적 잠복기 후에 드러나는 참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석면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폐암으로 사망한 것도 참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경제대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에서 화학물질로 인한 국지적 급성적 참사들이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도드라지게 발생되었다면, 만성적 참사는 암으로부터 생식독성으로 이어지면서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형세입니다.
한편, 화학물질 취급시설이나 저장시설에서의 폭발 누출로 인한 참사도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84년 인도 보팔참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1976년 이탈리아 세베소에서 농약원료 생산공장에서 다이옥신이 함유된 화학물질이 대규모로 누출되는 사고가 있습니다. 2015년 중국 텐진항의 화학물질 창고에 저장되어 있던 비료 성분들이 폭발하면서 173명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성 참사는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2012년 발생한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 누출사고는 동시대 국민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기억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성 참사의 경우 두려움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한 태풍이나 고온조건이 대형 화학산업시설을 제어불가능 상태로 만들 수 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습기살균제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마친 나는 인류의 관점에서 화학물질 참사를 바라볼 때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화학물질 참사의 시작점이 궁금해졌습니다. 화학물질 참사의 원인물질들은 화석연료로부터 인공적으로 추출하거나 합성한 것입니다. 따라서 석탄과 석유를 활용하게 된 것이 참사 발생의 시작점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19세기에 석탄 사용으로 스모그 같은 대기오염이 발생해 다수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것 또한 화학물질 참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 증기기관과 내연기관의 발명은 석탄과 석유의 과잉 사용을 촉발하면서 문제의 범위를 확장하고 심각성을 강화합니다. 원유를 정제하면서 가솔린 등 연료 이외의 버려지던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위해 크래킹과 촉매반응과 추출 기술이 개발되면서 다양한 화학물질의 추출과 반응을 촉진하고 결국 플라스틱의 개발까지 이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플라스틱은 정유과정에서 나온 가벼운 가스 성분들을 폐기처리하는 비용을 아끼려고 활용방안을 찾다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면서 석유화학산업은 더욱 대형화되었고,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력을 갖춘 국가들이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고 확장하는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최근 한일 무역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국내 불산생산기지가 강화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 결과 1940년대부터 화학물질은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에 돌입하고, 생활 속에 화학물질이 사용되는 방식과 규모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됩니다.

그렇다면 화학물질 안전관리의 지식과 도구는 화학물질 사용의 확장에 대비해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요? 19세기 중반부터 화학자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화학물질이 보관과 취급과정에서 서툰 사용자들에 의해 폭발사고가 나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안전관리 방법을 제시하는 팩트시트를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는 독성학을 안전과 연계할 수 없었습니다. 주로 인화점이나 어는점 같은 물리적 성질에 대한 정보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피해가 본격적으로 관찰되면서 1920년대 이후 독성학이 화학물질 영역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방독마스크 같은 기본적인 화학안전 보호구 조차 더 나중에 등장합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치면서 생화학 살상무기에 대비하기 위해 호흡 보호구가 개발되었고 공학적 환기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화학물질 독성시험법은 화학물질을 동물에게 먹여서 얼마나 죽는지 관찰하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개발된 방법으로 급성경구독성시험이라고 부르며 실험동물의 반이 죽는 수준(LD50)으로 독성을 표현합니다. 1970년대 미국 환경청에서 공인시험법으로 지정하고 1980년대 초반 OECD에서 첫 번째 공인시험법(TG 401)으로 인정하였다가, 2002년 동물실험의 윤리적 문제로 인하여 OECD가 공인시험법 자격을 폐지합니다. 죽음이라는 결과물로 독성을 표현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설명력 또한 떨어질 수 있습니다. 건강유해성은 세포와 조직의 손상과 괴사에 의한 사망 뿐 아니라 암이나 불임 그리고 정신질환과 같은 또 다른 심각한 문제들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자동차산업에서 가솔린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엔진 내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4-에틸납을 첨가제로 개발하였고, 이 첨가제를 개발하는 공장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납중독으로 정신착란 등 신경독성 피해를 입었습니다. 4-에틸납을 개발할 때, 이런 독성을 예측 평가하는 기술은 적용되지 않았고 참사를 겪은 후에야 위험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독성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를 충분히 만들기 전에 화학물질 사용이 확산되었다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한 피해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량사용된 화학물질의 대표격인 유기합성농약은 1930년대에 본격 개발되었고 1962년 레이첼칼슨의 침묵의 봄으로 그 위험이 폭로되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 미국 환경청(EPA)이 만들어지면서 모든 농약의 재등록을 추진하게 됩니다. 농약의 피해가 드러난 이후 그전까지 이루어지던 정부의 농약 안전관리를 부정하고 엄격한 관리를 새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폭발이나 누출사고 영역도 마찬가지의 경험들이 많습니다. 1970년대 미국 전역에서 화학물질에 대한 알권리법 제정운동이 대중적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방법 제정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인도 보팔 참사를 일으킨 유니언카바이드라는 농약회사가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1985년에 동일한 누출사고를 일으킵니다. 결국 연방차원에서 화학 사고에 대한 주민알권리법(EPCRA)을 제정하고 화학사고 관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됩니다. 언제나 안전은 참사 뒤에 따라오는 성찰이었고, 참사는 무비판적 생산과 소비의 댓가였습니다.

나는 전세계에서 벌어진 화학물질 참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해보았습니다. 첫째, 산업생산과 안전이 균형을 이루지 못했으며 위험에 대한 무지가 안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에러가 발생했습니다. 둘째, 기술이 초래한 위험이 정치·경제·사회·문화·환경적 요인으로 인하여 대규모 참사로 증폭되었습니다. 셋째, 참사를 계기로 위험관리 위임의 문제에 대한 집단적 의문이 대중 속에 형성되며, 집단적 국가 부정과 불신에 도달하는 경우 제도적 변화를 촉발하여 제도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비로소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산업화와 인류의 화학물질 사용 증가 그리고 전세계적 참사의 흐름 속에서 흐릿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유럽과 일본에 비해 뒤쳐진 산업화를 서두르면서 참사의 경험도 따라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온산병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발생 때 참사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가습기살균제 참사 이후에서야 화학물질 참사를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화학물질 참사가 한국이라는 특정 집단과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는 관점은 문제진단과 해결방식을 전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2016년 거대한 옥시불매의 대중운동이 있을 때, 나는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과 함께 화학안전을 요구하는 국민선언을 조직하였습니다. 국민선언에는 인류가 겪는 화학물질 참사의 관점에서 대안적 지향점을 제안하는 깨달음이 포함됩니다. 한편 정부도 움직였습니다. 2016년 말 정부합동으로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제도개선 대책이 발표되었습니다. 특히 정부대책에는 화학물질등록법 개정이 포함되는데, 이 부분은 조금 더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학물질등록평가법은 2013년에 제정됩니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입니다. 그래서 산업계의 전방위 로비 때문에 가습기살균제 참사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REACH를 시늉만 내는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옥시불매는 이 법률을 개정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유럽 REACH는 1톤 이상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화학물질 제조자와 수입자가 등록을 해야 합니다. 독성정보를 제출할 뿐 아니라 사용되는 용도와 안전사용 정보를 함께 제출하는 것이 등록이며, 이렇게 등록된 정보대로 사용자들이 사용할 의무가 부여됩니다. 유럽 REACH는 1976년 제정된 미국 독성물질관리법에 대한 반성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970년대 미국에서 화학물질 관리를 위한 법률을 제정할 때, 대량생산이 시작된지 이미 30년이 지나 수만 종의 화학물질이 시장에 유통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시장에 유통된 물질은 기존화학물질이라 부르고, 법제정 이후 시장에 진입할 물질을 신규화학물질이라고 구분했습니다. 신규화학물질의 제조자와 수입자에게는 정부에게 정보를 제출할 의무를 부여하는 한편, 기존화학물질은 포기합니다. 대신 정부 예산으로 독성을 확인하고 위해성을 평가한다고 하였으나 1년에 겨우 수십 개의 기존화학물질에 대해 실험했을 뿐입니다. 결국 미국의 독성물질관리법으로는 사람과 환경에 미치는 화학물질 피해를 예방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의 관리체계를 본따 화학물질을 관리하던 유럽은 오랜 토론 끝에 2001년 화학물질 관리를 위한 전략 백서를 채택하고 신규화학물질과 기존화학물질 구분을 폐기합니다. 미국에서 화학물질 관리 규제가 등장한지 40년 만에 유럽에서 모든 화학물질은 기업이 책임지고 정보를 생산해야 한다는 원칙이 실현된 것입니다. 하지만 2013년 제정된 우리나라의 화학물질등록평가법은 정부가 정하는 일부 물질만 등록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고, 대략 2천 종 정도만 등록할 계획이었습니다. 유럽 REACH를 흉내냈지만 기존의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는 실망스러운 법률이었습니다.
2016년 정부의 관계부처 합동 발표는 1톤 이상 모든 화학물질을 등록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반가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대책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하지 않고 다르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제가 볼 때 참사 이전 국가는 대부분 화학안전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소홀한 것이 공통점이었습니다. 참사는 이러한 문제를 드러내는 계기였으며, 국가시스템을 정비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로 작동했습니다. 보다 근본적 전환을 이룬 사회들은 사회적 각성이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참사의 원인인 위험에 대한 무지와 국가 시스템의 부실함을 정부가 국민이 함께 인정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문제를 함께 해결할 방안을 의논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화학물질과 산업기술 뿐 아니라 위험과 피해를 증폭시키는 정치, 사회, 경제 맥락적 원인들을 정부와 국민과 산업계가 함께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선택을 함께 내릴 때만 참사의 시대를 헤쳐나갈 집단적 지식과 경험이 축적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촛불과 탄핵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으나, 화학안전 정책을 만드는 방식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정부 위원회에 전문가 대신 시민사회단체가 들어가게 되었지만, 정부 위원회에서 의제를 만드는 권한은 정부가 독점하였으며 위원회 회의 공개는 거부당했습니다. 관료제와 대의민주주의 그리고 권력화된 전문가들 때문에 현대사회의 위험이 심화되고 있는데, 참사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편, 2018년이 되어도 화학물질 이슈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설치가 진행되고 있었고, 시민들이 원하는 안전한 사회를 정부가 담아낼 방법을 찾지 못해 화학안전 이슈가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한편 산업계는 산업계대로 강화된 법률이 시행되는 시점이 오면서 저항을 본격화했습니다. 2019년 즈음 경제신문들은 매일 화학물질 규제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놓았습니다. 정부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환경부가 2013년에 만들어진 생색내기 화학안전 규제 프레임을 개선한다고 했으나 소수의 전문가들과 정부 관료들이 주도하는 개선일 뿐이었고, 시민과 산업계가 이에 동조하지 않고 모두 불만을 터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직 참사에 따른 성찰의 기회가 남아있다고 본 나는 공론장을 통한 국민의 정책참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참고문헌
Davis D & Magee B. Cancer and Industrial Chemical Production. Science. 1979 Aug 30;206:13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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