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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로 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산업문명(1) 관점의 전환 - 2016년 국회 가습기살균제 특별조사위원회에서

  • 작성자 사진: 신범 김
    신범 김
  • 4월 26일
  • 3분 분량

2025년 4월 25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눠서 올립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2011년 질병관리본부(지금은 질병관리청) 역학조사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지만, 참사에 대한 국민의 경험은 2016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옥시와 김앤장과 전문가들이 실험조작을 통해 만든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환경피해나 참사는 의혹의 터널을 지납니다. 그래서 다른 참사와 비교할 때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5년이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러한 물리적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내일을 의심해야 하는 고통을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대신 우리는 의혹의 터널 안에서 진실이 방황하는 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한 절차와 방법을 국가시스템에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사를 겪은 사회가 달라지는 방법입니다.

     

2016년 검찰조사를 통해 가습기살균제 독성 실험결과가 조작되었고 민사법원에서 피해자들에게 억울한 합의가 종용되었다는 것을 국민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분노와 불매의 운동 속에서 나는 국회에 긴급히 만들어진 특별조사위원회 전문가 위원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참사의 원인규명과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라는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고 참사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수집된 사실들을 통해 참사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하여 낱개의 정보들에 존재하는 관계를 추적하면서 내가 찾고자 한 진실의 출발점을 확인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진상규명 또는 원인규명이라는 목적으로요. 하지만 나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어떤 프레임 속에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계속 묻게 되었습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라는 문제에 대해 왜 새로운 문제 정의가 필요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문제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책임의 좌표가 정해지며 재발방지라는 대책의 방향이 마련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로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을 정책학에서는 제3종 오류라고 부릅니다. 제3종 오류는 너무도 흔하게 발생합니다. 문제를 진단하려는 사람이 가진 가치가 참사를 구성하는 사실 중 어떤 부분들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거나 가리는 방향으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진단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주체들의 협업과정이어야 하며, 마침표가 없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피해자와 조사자가 함께 반복적인 질문을 통하여 의심하면서 다듬어나가는 순환과정이 된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다행히 나는 1999년부터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다양한 정책상황에 투입되었고 답이 없는 상황을 견디는 맷집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민연구소는 연구원들에게 발효의 시간을 선물합니다. 조급하게 답을 찾는 것보다는 진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세상에 도움되는 전문적 태도라는 깨달음 덕분에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조사에 참여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지 질문하는 매일의 두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특별조사위원회의 문제진단 과정에서 내가 본 대표적인 제3종 오류는 ‘유독물질 지정이 안되어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발생되었다’는 인식입니다. 가습기살균제가 개발되고 시장에 등장하던 당시 환경부와 국립환경과학원은 가습기살균제 원인물질에 대하여 유독물질 지정을 할 수 있는 정보도 능력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실패한 것은 결과이자 현상이지 원인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유독물질 지정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찾아보았고, 시대적으로 가능한 국가 업무 수준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관리체계가 존재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체계가 존재했다는 가정 하에 체계가 위임한 책임을 게을리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제가 볼 때 명백한 오류였습니다. 홍성욱 교수는 당시 국립환경연구원 조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유해성 심사를 담당하는 공무원들도 심사 물질에 대해서 깊이 분석을 해 볼 시간과 여유가 충분치 않았다. 국립환경연구원이 운영하는 "화학물질심사단"은 6명 대부분이 공무원으로 구성된 비정규조직이었는데, 이 작은 조직은 매년 쏟아지는 300여 종의 신규화학물질을 심사하는 데에만 해도 역부족이었고 기존화학물질까지 평가하는 것은 더더욱 문제였다. 또 OECD에서 인정하는 GLP기관이 4개에 불과해서 우선 관리가 필요한 특정 화학물질의 위해성을 평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신규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는 규정으로 정해진 급성독성 위주의 3개 항목에 국한되었다. 만성독성 및 환경잔류성 등에 대한 추가적인 평가는 사실상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이러다보니 심사단에 위해성 심사가 들어오면 1) 서류가 그 목적에 맞도록 제출돼 있는가를 검토하고, 2) 제출 서류의 신뢰성에 대한 사항을 검토하고, 3) 이런 검토의 기준을 가지고 물질의 위해성이 적합한지를 판단했다. 신청자가 제출한 서류에 의거해서 유해성 판단을 내리는 것이었다(홍성욱, 2018)."

이때부터 나는 화학물질로 인한 참사의 시대적 맥락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개별 사건과 특정 사고 속에 투입되어 날카로운 가치의 대립을 지켜보며 대응전략을 마련하던 기존 역할로부터 벗어날 필요를 느꼈고, 인류적 관점에서 화학물질 참사를 바라볼 필요를 깨달은 것입니다.




참고문헌

홍성욱.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료적 조직 문화. 과학기술학연구, 2018;18(1), 63–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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