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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물질로 본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그리고 산업문명(5) 다시 참사의 자리에서

  • 작성자 사진: 신범 김
    신범 김
  • 4월 26일
  • 4분 분량

2025년 4월 25일 경희대학교 HK+통합의료인문학연구단에서 강의한 내용을 나눠서 올립니다.

그렇다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다시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에서만 이러한 참사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위안이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기회를 나에게 제공하였으나, 그렇다고 내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이라는 공동 성찰의 장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앞으로 성찰해야 할 주제는 무엇이며 그 깊이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합니다. 또한 제도는 사회적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상상하는 힘이 충분한지 그리고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나와 나의 세대를 점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을 던집니다. “우린 앞으로 또 어떤 참사의 위기를 맞게 될까요? 우린 앞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어떤 참사를 만나게 될까요?” 이 질문은 이렇게도 연결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험에 대해 우리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요? 아니면 알기 위한 노력이 차단된 것일까요?” 화학물질로 인한 참사의 역사를 보면 생산이 안전에 대한 대비 이전에 확산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전주의적 관점이 산업계에 얼마나 수용되느냐 하는 점이 참사 위기 관리에서 매우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사전주의적 관점을 제도에도 잘 녹이지 못했으며, 생산과 소비의 원칙으로 확립하지도 못한 상황입니다. 화학안전정책포럼에서 유해성미확인물질 개념을 이해당사자간 합의로 마련한 것은 사전주의적 관점을 구현한 것이지만 한 개의 사례일 뿐이며 지속적으로 확장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시민사회단체가 위험을 바라보는 관점과 대응하는 원칙을 전략적으로 다시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위험을 평가하거나 위험을 관리하는 사회경제적 비용을 평가하는 것을 뛰어넘는 대안이 의논되는 것은 희망적입니다. 최근 몇 년간의 노력을 거쳐서 발암물질없는사회만들기국민행동과 한국페인트잉크공업협동조합이 페인트의 납을 90ppm으로 제한하는 것에 합의하였고, 환경부가 이것을 활용하여 납화합물을 제한물질로 지장하였습니다. 납의 위험은 이미 평가되어 있으나, 산업계 입장에서는 페인트 중 납에 의한 국민과 환경의 피해를 다시 평가하자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인트의 납을 줄이는 것이 장비나 건축물의 방청성을 훼손하여 피해를 발생시키는 것보다 이익인지 따져보자고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업계와 시민사회는 군수용, 항공기용 등 일부 방청성을 크게 요구하는 품목 외에는 납을 줄이기로 합의합니다. 심각한 독성물질이지만 한번에 모두 금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용도부터 없애나가자는 접근법을 ‘필수용도(Essential use) 개념을 활용한 허가와 제한’이라고 부릅니다. 정치적 절차 또는 민주주의 공론장을 통하여 위험에 대한 계산된 평가결과 없이도 위험을 관리하는 태도가 형성되는 것은 지극히 희망적인 것입니다.

     

이제 한국의 화학물질 위험은 민주주의에 기반하여 다시 구성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특히, 이해당사자들이 합의할 수 있는 정보가 없거나 판단이 모호한 영역은 공동의 실험을 통해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다시 판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대응일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우리의 원칙이라는 것을 함께 깊이 깨달을 수 있다면, 나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희망적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산업은 비용과 위험의 외부화를 토대로 번성해왔습니다. 폭발위험을 대비하여 바이패스 경로를 통해 배출되는 발암물질들에 대해 기업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높은 사망률을 보입니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소사장이 되면서 보호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인류문명 자체가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관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정회성은 지속불가능한 문명발달의 원인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일으킨 많은 문제들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전시킨 경우가 많았으며 이러한 주변과 타인에게의 이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특히 지역의 환경적 수용용량을 넘어서는 과잉개발을 하여 환경으로의 위협을 받았을지라도 항상 그 문제를 다른 지역 또는 다른 세대로 이전하고서는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착각하여 왔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러한 주위 이전능력이 우수한 국가와 민족이 번창하여 왔다는 것이다(정회성, 2008).”

     

유럽의 REACH는 새로운 화학물질 관리의 시대를 열었으나, 유럽권역에서 소비되지 않는다면 발암물질과 환경호르몬의 생산을 막지 않는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진레이온은 일본에서 사용하던 기계를 도입하여 발생한 참사입니다. 동남아시아가 전세계 옷공장이 된 것은 어떻게 봐야할까요? 물론 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스웨덴 화학물질감독청(KEMI) 공무원들은 스웨덴에서 생산된 노닐페놀계열 환경호르몬이 동남아 의류공장에서 계면활성제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동남아를 방문하여 노닐페놀을 수입해 사용하지 말라고 조언하러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법을 알려주는 존재들이 있어 다시 일어납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으로부터 기후위기와 화학물질 참사가 함께 태어났습니다. 최근 인류세에 대해 알게되면서 화학물질이 인류세와 얼마나 밀접한 존재인지 다시 깨닫습니다.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와 멸종, 인공물질의 퇴적과 지질학적 흔적들이 인류세를 설명하는 방법들입니다. 퇴적된 인공물질은 콘크리트와 플라스틱입니다. 그리고 플라스틱 퇴적암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웠습니다. 굴뚝과 배기구로 배출된 이산화탄소 등의 가스류가 기후위기를 일으키는데, 벤젠과 프탈레이트 같은 휘발성이 있는 액체류가 수많은 환경병과 직업병을 일으켰는데, 플라스틱이 이렇게 강조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혹시 플라스틱이 고체라서 그런 것일까요? 기체와 액체는 희석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고체는 계속 눈에 밟힙니다. 기체와 액체에 비해 고체는 물리적으로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영향력도 다른 것 같습니다. 고체는 생활 자체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나무와 돌과 흙으로 된 집에 살지 않고 플라스틱으로 조립한 공간에서 살고 일합니다. 자동차 차체도 플라스틱이 대체하려는 시대입니다. 학교운동장은 인조잔디와 우레탄 트랙으로 덮여 있습니다. 땅위를 달리는 것이 아니라 고체인 화학물질 위를 달립니다. 화학물질로 만든 운동복과 러닝화를 신고 말입니다. 지질학적 흔적이란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위기를 인식하는 기제를 건드린 것일까요?

     

플라스틱이 가져온 깨달음은 근본적 성찰과 이어져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생수를 마시며 미세플라스틱을 걱정하는 사람은 지구의 지질층에 퇴적되는 플라스틱처럼 내 몸안에 플라스틱이 쌓인다고 상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중합반응을 거치기 전, 플라스틱이 되기 전 정유공장의 정유탑 맨 꼭대기로 배출되는 가스로부터 일부는 기후를 교란하고 일부는 생태계를 교란하며 일부는 플라스틱이 되어 사람 몸의 호르몬을 교란하는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일까요? 어떠한 상상력이 형성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꽤 달라질 것 같습니다.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꾸준히 참사의 자리로 돌아가서 성급한 실천 뒤에 소중한 성찰을 두고오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 말고 할 수 있었고 해야 했던 일들은 없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인류문명에 대한 근본적 회의 속에서 우주선을 타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 위에 다른 문명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새로운 감수성을 갖기 위해 도전해보겠습니다. 일단은 화학물질의 문제를 놓고 민주적 공론장에서 토론하는 힘이 화학물질 문제 뿐 아니라 기후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지혜와 실천 형성으로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기후위기, 인류세, 미세플라스틱, 화학물질참사를 하나로 보는 프레임
기후위기, 인류세, 미세플라스틱, 화학물질참사를 하나로 보는 프레임


참고문헌

정회성. 환경변화와 인류문명 그리고 지속가능발전. 환경논집. 2008;47.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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